수정본 28

노란 아이

황혼이 깔린 시간 학교 운동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다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앉아있다. 쨍쨍한 햇빛 아래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떠나가고 무거운 책가방을 지고 땅바닥을 유심히 살펴가는 한 아이가 지나간다. 그 아이가 나를 한 번 쳐다보고 참새처럼 총총 걸어간다. 그 아이가 나를 또 다시 쳐다보고 모래알을 차며 걸어간다. 작은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내게로 춤추듯 다가온다.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아 모래 바람을 타고 사라진 걸까. 그 아이가 사라진 자리엔 쓸데없이 커진 두 발만이 단지 노랗게 보일 뿐이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언가 달라질지 의문스럽다. 어느새 노란 밤이 하늘을 뒤덮었다. from : https://www.instagram.com/p/B92zaOjnb4O/?utm_s..

겨울잠

매서운 계절에 추위를 타 포근한 땅 한 칸 찾는다. 새하얀 햇볕 쬔 눈밭 아래 촉촉한 흙 덕지덕지 붙은 나무 밑동 호적한 그 아래 땅 짐승 세 놓은 그 자리에 눈치 없이 비집고 들어가 엉덩이 붙여 자리 잡는다. 낡은 몸뚱이 한껏 웅크린다. 한 줌 마음 옆에 가지런히 땅에 귀 대고 잠을 청한다. 이 겨울 동안 아무 일 없길. from : https://www.instagram.com/p/CLDnUF8ndxs/?utm_source=ig_web_copy_link

풍화

바람을 맞으면 등을 돌리고 비가 떨어지면 몸을 숨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쑤시더라. 아마도 누군가 지켜보는 사람 있어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팼나 보다. 몸을 가눌 때마다 쑤셔오는 기억에 길을 걸을 때마다 숙여지는 머리. 이젠 바람 맞아갈 때 고개 돌릴 일 없이 이젠 비가 떨어질 때 숨어 버릴 일 없이 마지막 한 줌의 뜨거움 불태워 온몸으로 풍화하며 살아가련다. from : https://www.instagram.com/p/B--8mAXHwKt/?utm_source=ig_web_copy_link

낙화

벼랑 끝에서 내려본 땅바닥은 너무 좁은 곳이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시린 바람이 몸을 뒤로 밀어낸다. 까치발 들고 아래를 내려 본다. 차갑게 쌓인 눈더미가 두 눈을 따갑게 찔렀다. 아찔하다. 주춤하는 걸음에 후두둑 야생화 한송이가 뿔뿔이 아련히 흩어진다. 멀어지는 풍경에 가까워지는 땅바닥 가련한 야생화 꽃잎이 빨갛게 흰 눈 위에 흩뿌려졌다. from : https://www.instagram.com/p/B-I4T4DHHhy/?utm_source=ig_web_copy_link

영화

있잖아. 너가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은 정말 영화같이 아름다웠어. 따사로운 햇살이 찬연히 네 얼굴을 비추고 싱그러운 봄바람이 산뜻히 네 머리를 살랑였지. 그래서였을까 나는 결국 너에게 고백을 했고 우린 영화같이 아름다운 시간들을 함께 보냈지. 그래서였을까 나는 점점 이 영화가 끝이 날까 봐 두려워졌어. 어떤 결말이 될지도. 그런데 결말은 급작스럽게 가장 허무하게 가장 슬프게 있잖아. 나는 아직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나 봐. from : https://www.instagram.com/p/B95bPvgHAjT/?utm_source=ig_web_copy_link

내쉬는 한 번의 숨에 담긴 건 아픔인가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다치게 할 맘 없었고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아프게 할 맘 없었어요.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내몸 내연기관 아닌데 내숨 무겁지도 않은데 들이쉬는 한 번의 숨에 담긴 건 무엇인가요. 내가 당신을 마주보고 당신이 나를 마주보면 우리 무엇을 나누나요. 우리 나누면 아픔인가요. from : https://www.instagram.com/p/CNZMIKUng52/?utm_source=ig_web_copy_link

석화

아아, 나는 정말로 하찮구나. 돌 하나 씹어먹지 못하는 나는 소용이 없구나. 바라건대 간절히 바라건대 누가 나 대신 이 목 타는 갈증을 채워주어라. 아아, 나는 바라는 게 많다. 돌가루 잘근잘근 머금은 나는 갈증이 난다. 바라건대 간절히 바라건대 누가 나 대신 이 엿같은 세상을 바꿔주어라. 아아, 나는 생각지 않는다. 돌같은 내 일신의 안녕 나는 하찮을 뿐이다. 아아, 바라건대 바라건대 먼 훗날 반드시 내게로 반드시 와주어라. 아아, 바라건대 바라건대 두 볼 물 가득 머금어라. 두 볼 빵빵하게 가득. 아아, 바라건대 바라건대 나 대신 행복해주어라. 반드시 행복해주어라. from : https://www.instagram.com/p/CBjecHZHnFr/?utm_source=ig_web_copy_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