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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포메이션, 제임스 글릭 / 동아시아

neulvo 2024. 2. 29. 20:42

유기체의 세포는 복잡하게 얽힌 통신 네트워크에서 송신과 수신, 코딩과 디코딩을 하는 노드이다. 진화 자체가 유기체와 환경 사이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보 교환을 포함한다.

비트는 다른 종류의 기본 입자로, 말하자면 이진수, 플립-플롭, '예' 혹은 '아니요'로 이루어진 작고 추상적인 기본 입자이다.

"비트에서 존재로 It from Bit." 정보는 "모든 존잴르 낳는다. 모든 입자, 모든 힘의 장, 심지어 시공연속체 자체를 낳는다."

휠러는 점잖게 이렇게 썼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아니요'의 질문을 제기하는 최종 분석에서 생겨난다. 모든 물리적 대상은 근본적으로 정보이론적이며, 이것이 바로 참여 우주이다."

우주는 자신의 운명을 계산한다.

우주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계산하는 것일까? 얼마나 빨리 계산할까? 우주의 전체 정보 용량과 메모리 용량은 얼마나 될까? 에너지와 정보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비트를 바꾸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까?

분명 비효율적인 잉여성은 혼란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잉여성은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모든 자연어는 잉여성을 내포한다.

가령 B와 V는 발음상 혼동하기 쉽기 때문에 브라보와 빅터로 대체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M과 N은 마이크와 노벰버로 대체된다. 숫자의 경우 특히 혼동하기 쉬운 파이브와 나인은 피페와 나이너로 말한다. 이처럼 추가된 음절은 말하는 북의 장황한 표현과 같은 기능을 한다.

벨 연구소의 전화 엔지니어인 랠프 하틀리가 쓴 논문은 $$H=nlogs$$ 라는 상당히 연관성이 높은 공식을 담고 있다. 여기서 H는 정보량, n은 메시지를 구성하는 기호의 수, s는 해당 언어가 가진 전체 기호의 수를 가리켰다.

기록은 역사의 첫새벽에 등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는 기록과 함께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거는 기록을 통해 비로소 과거로 남는다.

대중들은 아름다움이라는 관념 그 자체 대신 수많은 아름다운 사물을 받아들인다. 또한 본질로 여겨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구체적 사물들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대중은 철학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여기서 '대중'은 '문맹'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은 여전히 남아 있는 구술문화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문맹들은 온갖 사물들의 다양성 속에서 넋을 잃고 헤맨다. 이들의 영혼에는 선명한 문양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듯 기록된 말(지속성을 얻은 말)은 의식적 사고의 전제 조건이다.

논리는 기록과 별개로 존재하며, 가령 삼단논법은 글뿐만 아니라 말로도 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말은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분석이 가능하지 않다. 논리는 그리스와 인도 그리고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글을 통해 전승됐다. 논리는 추상화라는 행위를 참과 거짓을 가리는 도구로 바꾼다. 즉, 확고한 경험과 별개로 글만으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논리는 연쇄적인 형식을 지니며, 연쇄를 통해 각 요소들이 서로 연결된다. 결론은 전제를 통해 도출된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일관성(불변성)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분석하고 평가하지 못하면 결론은 아무 힘을 지니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문자는 음성을 나타내는 형태이다. 따라서 문자는 눈이라는 창을 통해 머리로 들어오는 사물을 표상한다." 중세 영국의 솔즈베리의 요하네스의 설명이다.

"알파벳은 시각적 파편화와 전문화의 기술이다. 따라서 분류된 데이터라는 사막으로 이어진다." 매클루언의 비판에 따르면 활자는 좁은 의사 소통 채널일 뿐이다. 이 채널은 단선적이며 심지어 파편화되어 있다. 반면 말은 원시적인 경우로, 몸짓과 접촉을 수반하여 생생하게 이뤄지는 대면 의사소통이다. 청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을 끌어들인다. 의사소통의 이상이 영혼의 만남이라면 글은 그 이상의 슬픈 그림자일 뿐이다.

매클루언을 인터뷰한 사람은 "하지만 부족을 벗어난 인간은 통찰력과 이해력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으로 상응하는 보상을 얻지 않습니까?"라고 애처롭게 물었다. 매클루언은 "그 질문은 문식자의 모든 제도화된 편견을 드러내는군요"라고 대답했다.

옹은 이렇게 덧붙였다. "마음에는 사전이 없다는 것, 사전편찬은 언어가 만들어지고 한참 후에 이뤄졌다는 사실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바늘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전류는 흘렀고 차단됐으며, 차단을 조직하여 의미를 생성할 수 있었다. 아이디어는 단순했지만 모스가 만든 첫 번째 전신기는 태엽장치, 나무 추, 연필, 종이 띠, 롤러, 크랭크로 구성된 복잡한 기구였다. 노련한 기술자였던 베일은 모든 것을 단순화했다. 베일은 발신부에 있어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아이콘이 된 기구를 발명했다. 바로 손가락으로 회로를 제어할 수 있는 간단한 스프링 작동식 레버였다. 베일은 처음에 이 레버를 "교신기"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그냥 "키"라고 불렀다. 간단하게 조작할 수 있었던 키는 휘트스톤과 쿡이 사용한 버튼과 크랭크보다 10배 정도 빨랐다. 키를 사용하면 전신수는 결국 회로의 단순한 차단에 불과한 신호를 분당 수백 개씩 보낼 수 있었다.

한쪽 끝에는 회로를 열고 닫는 레버가, 다른 쪽 끝에는 전자기를 제어하는 전류가 있었다. 이들 중 한 명(아마도 베일)은 둘을 하나로 합치는 방안을 생각했다. 자석이 레퍼를 작동할 수 있었다. 프린스턴의 조지프 헨리와 영국의 에드워드 데이비가 거의 동시에 발명한 이 조합은 지친 말을 대신하는 새 말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유래한 "릴레이"로 불렸다. 릴레이는 장거리 전기전신의 가장 큰 장애물을 제거했다. 바로 전선을 지나면서 전류가 약화되는 문제였다. 약화된 전류도 릴레이를 작동해 새로운 배터리로 돌아가는 새로운 회로를 만들 수 있었다. 릴레이는 발명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잠재력이 컸다. 릴레이는 신호가 스스로 전파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신호를 되돌릴 수도 있었다. 또한 여러 군데서 나온 신호들을 통합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는 나중의 일이었다.

아울러 모든 이항 선택은 생각의 표현이었다.

단어에서 의미를 제거하면 안정성이 상당히 증가한다. 기호와 상징은 단지 자리만 차지하는 존재가 아니다. 말하자면 연산자로, 기계에서 기어와 레버와 같은 것이다. 언어는 결국 하나의 도구이다.

이로써 언어는 이제 표현과 사고라는 두 가지 독립적 기능을 하는 도구로 인식된다. 맨 처음 오는 것은 사고였다. 아니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추정했다.

1873년 한 평론가는 <하퍼스 뉴 먼슬리 매거진>에 실은 글에서 "말은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신호로 사용하기 이전에 생각을 위한 도구"라고 주장했다.

하틀리는 '정보 information'이라는 색다른 단어를 썼다.

가능한 기호의 수가 많을 수록 각각의 선택은 더 많은 정보를 지닌다.

각 동작이 완료된 후 기계는 새로운 상태가 된다. 이 새로운 상태는 이전과 똑같거나 다를 수 있다. 특정한 계산에 사용되는 다양한 상태들은 표에 저장됐다. 이를 물리적으로 조작하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상태표는 사실상 기계의 지시서에 해당했다.

먼저 섀넌은 "의미"를 제거해야 했다. 강조하는 큰 따옴표는 그가 붙인 것이었다. 섀넌은 기꺼이 이렇게 말한다. "메시지의 '의미'는 대체로 아무 상관이 없다."

정보는 불확실성, 의외성, 어려움, 엔트로피였다.

"정보는 불확실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불확실성은 결국 가능항 메시지의 수를 셈으로써 측정할 수 있다. 단 하나의 메시지만 가능하다면 불확실성이 없으며, 따라서 정보도 없다.

어떤 메시지는 다른 메시지보다 더 그럴듯하며 , 정보는 의외성을 내포한다. 의외성은 확률을 설명하느 한 방법이다. 영어에서 't' 뒤에 나오는 글자가 'h'라면 그다지 많은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다. 'h'가 나올 확률이 비교적 높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메시지를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전달하는 것의 어려움이다." 아마 이 말은 하나마나 한 이야기처럼 혹은 동어반복으로 들릴 것이다. 마치 물체를 이동하는 데 필요한 힘의 개념으로 질량을 정의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질량은 그런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정보는 엔트로피이다. 이 부분이 가장 이상하고 강력한 개념이다. 엔트로피는(이미 어렵고 형편없이 이해되는 개념이었다.) 열과 에너지를 다루는 학문인 열역학에서 무질서의 척도였다.

통신의 근본 문제는 한 지점에서 선택된 메시지를 다른 지점에 정확하게 혹은 비슷하게 재현하는 데 있다.

섀넌이 생각했듯이 메시지는 동역학계처럼 움직였다. 과거의 역사에 의해 미래의 경로가 결정되는 것이다.

섀넌은 'H'로 표기되는 정보의 척도를 "사건에 '선택'이 얼마나 개입하는지 혹은 결과가 얼마나 불확실한지" 말해주는 불확실성의 척도로 정의하려 했다. 각각의 확률은 같거나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보다 큰 불확실성, 보다 많은 정보를 의미한다.

"귀결되는 단위는 바이너리 디지트(이진 부호) 또는 줄여서 '비트 bit'라고 부를 수 있다."

이전에 나온 것을 토대로 추측할 수 있는 글자는 잉여성이 있으며, 잉여성이 있는 한 새로운 정보는 없다.

근본적으로 1비트는 언제나 한 번의 동전 던지기이다.

'Cybernetics'라는 단어는 '키잡이'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kubernites)'에서 따온 것이었다.

피드백은 회로의 출력부에서 입력부로 향하는 에너지의 회귀를 뜻한다.

컴퓨터가 릴레이를 활용한다면, 두뇌는 뉴런을 활용한다. 뉴런의 세포들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 두 가지 상태 중 하나에 있다. 활동하거나 아니면 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 상태를 가진 릴레이로 볼 수 있다.

위너의 말을 들어보자. "정보는 정보일 뿐, 물질이나 에너지가 아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어떤 유물론도 오늘날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매컬럭은 인식아는 계산기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기계는 다른 릴레이로부터 신호를 받아서 전달하는 수백억 개의 릴레이로 구성된 두뇌이다. 신호는 양자화되어 있어서, 발생하거나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은 다시 한 번 데모크리토스의 원자, 즉 "빈 공간에서 깜빡이는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이는 항상 '움직이는' 세상, 다시 말해 헤라클레이토스를 위한 세상입니다. 제 말씀은 그저 모든 릴레이가 스스로 불꽃처럼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많은 채널을 통해 릴레이로 쏟아지고, 릴레이를 통해 전달되고, 릴레이 안에서 소용돌이치다가, 다시 세상으로 떠오르는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 릴레이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위너에게 엔트로피는 무질서의 척도인 반면 섀넌에게는 불확실성의 척도였다.

정보는 뜻밖의 것이다.

"정보는 무질서에서 쥐어짜낸 질서라고 볼 수 있다."

섀넌이 기계의 기억을 조작한 방식, 즉 한 방향을 각 칸에 결부시킨 방식에서 특이한 점은 경로를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기계는 목표지점에 도달해도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기계는 목표지점에 도달해도 출발지점으로 돌아가는 법을 '알지' 못했다. 변변치는 않지만 이런 지식은 섀넌이 벡터장이라고 부른 전체 25개의 방향성 벡터에서 나왔다. 섀넌의 설명을 들어보자. "메모리를 분석해도 탐지기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헝가리의 전기공학자로 후에 홀로그래피를 발명한 공로로 노벨상을 탄 데니스 가보르는 이렇게 불평했다. "사실 생쥐가 아니라 미로가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타당한 지적이었다. 결국 생쥐는 없었던 것이다. 전자식 릴레이는 어디에나 놓을 수 있고, 이 릴레이가 기억을 지닌다는 얘기였다. 사실상 릴레이가 미로의 지적 모델이자 미로의 '이론'이었다.

디지털 컴퓨터는 인간의 기억 혹은 종이에 해당하는 "정보 저장소", 개별 동작들을 수행하는 "실행부", 지시문의 목록을 관리하고 올바른 순서로 실행하는 "제어부", 이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됐다. 지시문은 숫자로 인코딩됐다. 튜링은 때로 이 지시문은 "프로그램"으로, 지시문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은 "프로그래밍"으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당시 사람들은 디지털 컴퓨터의 마법이 본질적으로 전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불어 신경계 또한 전기적이라 여겼다. 하지만 튜링은 연산을 보편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추상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연산은 전기와 전혀 관련이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닫힌계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든 간에 모든 것이 같은 온도에 이르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제1법칙: 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다.

제2법칙: 우주의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한다.

1862년 톰슨은 이렇게 썼다. "비록 기계적 에너지는 '파괴할 수 없지만' 에너지 소산은 우주적 측면에서 볼 때 열의 점진적 증가와 확산, 운동의 정지, 물질세계에서 잠재적 에너지의 소진을 낳는 경향이 있다. 결국 우주는 정지와 죽음의 상태에 빠질 것이다.

원자로 구성된 기체는 절대로 단순하거나 고요하지 않다. 기체는 동요하는 입자들의 거대한 앙상블이다.

"비가역성은 삶의 보편적 우연들에서 기인한다.

통계적으로 모든 것은 최대 엔트로피를 향해 가는 경향을 지닌다.

계가 배열되는 모든 방식을 세어보면 무질서한 형태가 질서 정연한 형태보다 훨씬 많다. 분자가 모두 뒤엉킨 배열 혹은 "상태"는 많으며, 깔끔하게 정돈된 배열이나 상태는 드물다. 질서 정연한 상태는 확률도 낮고 엔트로피도 낮다.

결국 물리학자들은 미시상태와 거시상태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거시상태에서 기체는 전부 상자의 위쪽 절반에 몰려 있을 수도 있다. 이에 해당하는 미시상태들은 거시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개별 분자들 각각의 위치와 속도의 구성 전체이다. 따라서 엔트로피는 확률의 물리적 등가물이 된다. 특정한 거시상태의 엔트로피는 가능한 미시상태의 수의 로그이다. 따라서 제2법칙은 확률이 낮은(질서 정연한) 거시상태에서 높은(무질서한) 거시상태로 이동하려는 우주의 경향이다.

물리학에는 기체가 스스로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으로 나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이는 오직 우연과 통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까? 맥스웰은 사고실험을 통해 이 수수께끼를 설명했다. 맥스웰은 기체 상자를 나누는 칸막이에 난 작은 구멍으로 감시하는 "유한한 존재"를 상상해보라고 제안한다. 이 존재는 다가오는 분자를 볼 수 있고, 빠른지 혹은 느린지 구분할 수 있으며, 통과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즉, 확률을 바꿀 수 있다. 빠른 것과 느린 것을 나눔으로써 한쪽을 뜨겁게, 다른 쪽을 차갑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 행해진 것은 아니며 오직 매우 눈매가 좋고 솜씨가 좋은 지성이 활용되었을 뿐이다." 이 존재는 일반적인 확률을 거스른다. 대개의 경우 사물들은 서로 뒤섞인다. 사람들을 분류하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이 도깨비는 밀폐된 항아리 혹은 쇠막대기의 한쪽을 점점 뜨겁게, 다른 쪽을 아주 차갑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세면기에서 이동하는 분자의 에너지를 유도하여 물을 높은 곳으로 역류시키고 비교적 차가운 상태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소금용액에서 물의 일부분에만 소금을 농축하여 나머지 공간에 깨끗한 물을 남기거나, 두 가지 기체가 섞인 혼합체 속 분자들을 "분류"해 자연스러운 확산 과정을 되돌림으로써 두 가지 기체를 용기 안에서 분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크고 느리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 즉 제2법칙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통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도깨비는 본다.

도깨비는 우연을 목적으로 대체하고, 정보를 이용하여 엔트로피를 줄인다.

이 도깨비는 물리학의 세계에서 정보의 세계로 가는 입구를(처음에는 마법의 관문이었다) 지켰다.

앙리 푸앵카레는 이 도깨비가 "극도로 민감한 감각을 지녔으며" "우주의 경로를 되돌릴 수 있다"라고 썼다.

영국의 생물학자인 제임스 존스톤은 1914년 이렇게 썼다. "이제 우리는 과학에 도깨비론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물리학에서 개별 분자들은 우리의 통제권 밖에 남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개별 분자들의 운동과 경로는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말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난장판'이다. 물리학은 통계적 '평균' 속도만을 고려한다." 물리학의 현상들이 비가역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으며, "따라서 최근 과학에서 맥스웰의 도깨비가 있을 자리는 없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떨까? 생리학은 어떨까? 존스톤은 생명의 과정들이 '가역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유기체가 본디 비조직적인 개별 분자의 운동을 '제어할 수 있다는' 증거를 찾아야만 한다."

"왜 우리는 모든 열을 이용할 수 없을까?"

"신경계의 존재 자체가 지속적인 에너지의 소산에 달려 있다."

이 도깨비는 한 번에 한 입자씩 정보와 에너지 사이의 변환을 실행한다. 아직 '정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던 실라르드는 각각의 측정과 기억을 정확히 이해하면 변환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국 계산해낸다. 계산 결과 각 정보 단위는 구체적으로 $$klog2$$ 단위에 해당하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져왔다. 도깨비가 한 입자와 다른 입자 사이에서 선택을 할 때마다 1비트의 정보가 소요된다. 한 번의 주기가 끝나서 기억을 지워야 할 때 정보가 회수된다(실라르드는 이 마지막 세부 사항을 글이 아니라 수학으로 명시했다).

생물은 주위 환경의 무질서를 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뼈와 살, 소포와 막, 껍질과 갑각, 입과 꽃, 순환계와 대사 경로에서 보듯) 경이로운 패턴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로 엔트로피를 줄이는 것이 이 우주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비현실적인 존재 이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슷한 환경에서 무생물이 '계속할 것'으로 기대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움직이거나 환경과 물질을 교환하는 등 '어떤 일'을 계속할 때 우리는 살아 있다고 합니다."

최대 엔트로피에 이르면서 제2법칙을 따른다. 반면 생물은 어떻게든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슈뢰딩거는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덜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신진대사에서 본질적인 것은 유기체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생성하는 모든 엔트로피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기체는 주위에서 질서를 빨아들인다.

슈뢰딩건느 "비주기적 결정체"라는 용어를 내놓는다. "우리는 유전자 혹은 전체 염색체 섬유가 비주기적 고체라고 믿는다." 이것이 슈뢰딩거의 가설이었다.

지구는 닫힌계가 아니며, 생명은 이 지구 시스템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에너지와 네거티브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 ... 순환주기는 이렇다. 먼저 불안정한 평행상태(연료, 음식, 폭포 등)가 생성된다. 그런 다음 모든 생명체가 이 비축물들을 사용한다.

"모든 유기체의 '개별적 특성'은 자손의 특성을 전혀 유발하지 않으며, 조상과 후손의 특성은 모두 발생의 기원인 생식체 같은 '성물질'의 속성에 의해 거의 같은 방식으로 결정된다." 유전되는 것은 더 추상적이고 더 잠재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DNA는 두 가지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정보를 보존한다. ... 둘째, DNA는 또한 유기체의 형성 과정에서 활용하기 위해 그 정보를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1차원적 가닥에 저장된 데이터가 3차원으로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DNA 복제는 정보를 복사하는 것이다. 단백질 제조는 정보를 전송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코돈 중에는 잉여적인 것도 있고, 사실상 시작 신호와 정지 신호의 기능을 하는 것도 있다. 잉여성은 정확히 정보이론가들이 예상한 기능을 수행한다. 즉, 오류에 대한 허용오차를 제공하는 것이다. 잡음은 다른 모든 메시지와 같이 생물학적 메시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DNA의 오류, 즉 오식은 돌연변이를 초래한다.

"사실상 유전자는 단백질 아미노산의 선형적 배열을 결정하는 DNA 뉴클레오타이드의 선형적 배열이다."

DNA가 수십억 년 먼저 등장했으며, 제대로 된 관점에서 생명을 바라보면 지금도 DNA가 먼저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따르면, 유전자가 중심이고, 필수조건이며, 주연이다. 도킨스는 1976년 자신의 첫 책이자 대중을 상대로 쓴 도발적인 제목의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우리는 생존 기계, 즉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 분자를 보존하도록 맹목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로봇 이동수단"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수십 년에 걸친 논쟁을 촉발시켰다.

유기체가 아니라 유전자가 자연선택의 진정한 단위이다. 자신을 복제하는 흔치 않은 속성을 가진 유전자는 원시 수프에서 우연히 형성된 분자인 "자기 복제자"로 시작했다.

"인간중심주의는 지성의 발전을 가로막는 해악이다."

도킨스는 이타주의를 설명하는 것에 일부 목적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개체가 최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 "누가 이득을 보는가?" ... 그러나 도킨스가 보여준 것처럼 관점을 바꾸어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를 최대화하기 위해 움직인다고 말하면 꽤나 잘 들어맞는다.

도킨스는 이렇게 말한다. "유전자는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 유전자는 단지 '존재'할 뿐이며, 일부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보다 더 그렇다. 그것이 전부이다."

생명의 역사는 네거티브 엔트로피의 관점에서 기록된다. "실제로 진화하는 것은 그 모든 형태 혹은 변형 안에 있는 정보이다. 내 생각에 생명체에 대한 지침서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첫 줄에 하나의 계명처럼 '너의 정보를 더 키워라'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심지어 눈의 색깔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것을 위한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대신 유전자 사이의 차이가 표현형(실현된 유기체)의 차이를 낳는 경향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는 결국 유전자의 핵심은 '차이'에 있다고 지적했다.

도킨스는, 따라서 유전자는 "노쇠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100만 년 동안 존재했다고 해서 100년밖에 존재하지 않은 것보다 죽을 확률이 높은 것은 아니다. 유전자는 세대를 거쳐 몸에서 몸으로 내려오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방식으로 이 몸에 이어서 저 몸을 조종하다가 노쇠와 죽음에 빠지기 전에 필멸의 몸들을 연달아 버린다.

관념은 유기체의 속성을 일부 지닌다. 관념은 유기체처럼 구조를 영속시키고 번식하는 경향을 지닌다. 또한 관념도 내용물을 융합하고 재조합하고 분리할 수 있다. 실제로 관념도 진화할 수 있으며, 이 진화에서 선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은 그저 유전자가 더 많은 유전자를 만드는 수단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했다. 이제 인간은 밈의 번식을 위한 수단으로도 여겨졌다.

다른 내용은 차치하고 행운의 편지에는 메시지 하나가 들어 있다. 바로 '나를 복제하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휠러는 이런 이야기를 자주했다. "확률은 시간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며, 따라서 확률에 수반되는 모호성은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한다."

"우연은 무지의 척도일 뿐이다. 우발적인 현상은 정의상 우리가 그 법칙을 모르는 것이다." 앙리 푸앵카레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물리학에서(혹은 자연적 과정들이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분야에서) 명백한 무작위성은 잡음일 수도 있고, 매우 복잡한 역학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무지는 주관적이다. 무지는 관찰자의 속성이다. 무작위성은 (만약 존재한다면) 사물 자체의 속성일 것이다.

무작위성은 질서라는 측면에서 정의할 수 있다. 말하자면 무작위성은 질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섀넌은 동시에 메시지 내의 잉여성, 즉 메시지를 압축할 수 있게 만드는 패턴, 규칙성, 질서도 고려했다. 메시지의 규칙성이 클수록 예측성이 높아진다. 예측성이 높을수록 잉여성은 커진다. 잉여성이 클수록 포함되는 정보는 줄어드는 것이다.

"매 순간 '하찮은'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밖에 없다. 이 미세한 차이 안에서 수학적 발견이 이뤄진다." 콜모고로프가 일기에 쓴 말이다.

어떤 대상의 복잡성은 이 대상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가장 작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크기이다. 짧은 알고리즘으로 생성할 수 있는 대상은 복잡성이 낮다.

"자연수는 아주 많다. 만약 프로그램이 더 작아야 한다면 모든 다른 자연수를 명명하기에 충분할 만큼 있지 않다." 따라서 어떤 길이의 수라도 대부분읜 n은 무작위적이다.

알고리즘적 정보이론은, 이상적이고 정신적인 우주인 모든 수의 우주에서도 동일한 한계를 적용했다. 체이틴 말마따나 "신은 양자물리학과 비선형 역학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수론에서도 주사위 놀이를 한다."

카오스적 궤도는 존재한다. 하지만 괴델의 후손인 카오스적 궤도는 너무나 복잡하고 엄청나게 정보가 가득해서 인간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카오스는 자연 어디에나 있다. 따라서 우주는 인간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신비로 가득하다.

섀넌이 보기에 압축이 핵심이었다.

러시아 이민자의 자녀로 시카고대학에서 수학한 레이 솔로모노프는 1950년대 초반 섀넌의 논문을 접하고는 섀넌이 정보 패킹 문제라 말한 것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주어진 수의 비트에 얼마나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지 혹은 반대로 어떤 정보가 주어졌을 때 가능한 한 가장 적은 비트에 어떻게 담을 것인지를 다루었다.

메시지에서 무작위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압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보여준 것은 섀넌이었다.

진정한 무작위적 수열은 정규적이어야 하지만 그 역이 반드시 성립하지는 않는다.

진화는 단순한 초기조건에서 시작된다. 분명히 이를 기반으로 복잡성이 발생한다.

에너지가 클수록 비트가 더 빨리 바뀐다. 흙, 공기, 불, 물은 결국 모두 에너지로 구성되지만 이들이 취하는 다양한 형태는 정보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일을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한 일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정보 손실은 확률의 합이 1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 즉 유니터리성을 침해했다. 호킹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할 뿐만 아니라 때로 주사위를 볼 수 없는 곳으로 던진다"라고 말했다.

"한떄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분기하는 아기 우주는 없다. 정보는 우리의 우주에 확고하게 남는다. 공상과학소설 팬들을 실망시켜서 미안하다."

1961년 정보처리 비용에 대한 폰 노이만의 공식을 증명하려던 그는 공식을 증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논리 연산은 어떤 엔트로피 비용도 들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비트가 0에서 1 혹은 그 반대로 바뀔 때 정보가 보존된다. 이 과정은 가역적이다. 엔트로피는 변하지 않으며, 열을 소산할 필요도 없다. 란다우어는 오직 비가역적 연산만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고 주장했다.

베넷은 모든 사례에서 정보가 '삭제'될 때만 열 소산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삭제는 비가역적인 논리연산이었다.

망각에는 일이 필요하다.

큐비트는 평범치 않은 최소 양자계이다.

큐비트의 0과 1값은 확실히 구별 가능한 양자 상태들, 가령 수평 편광과 수직 편광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확률로 0과 1을 향해 기울어진 대각 편광 같은 중간 상태들의 전체 연속체가 공존한다. 따라서 물리학자는 큐비트가 상태들의 '중첩', 즉 확률 진폭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큐비트는 비결정성의 구름 내부에 살고 있는 결정적 대상이다.

베넷의 말을 들어보자. "비무작위적인 전체가 무작위적인 부분들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양자역학에서 가장 반직관적인 부분이지만 중첩 원리의 결과로 일어나며 우리가 알다시피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안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것이며, 다른 대안들은 훨씬 나쁘다."

얽힘은 중첩 원리를 취하며 공간을 가로질러서 서로 멀리 떨어진 한 쌍의 큐비트로 중첩 원리를 확장한다. 이 큐비트들은 어느 것도 측정 가능한 개별적인 상태를 갖지 않지만 '한 쌍으로서' 명확한 상태를 가진다.

얽힌 입자들, 가령 같이 생성되어 지금은 몇 광년이나 떨어진 광자쌍의 경우 하나를 측정하면 다른 하나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앨리스가 광자의 수직 편광을 측정하는 순간 봅의 괒아 역시 그 축에 대한 명확한 편광 상태를 가지는 반면, 그 대각 편광은 불명확할 것이다. 따라서 측정이 빛보다 빠르게 달려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비국지성'이 모두 EPR 사고실험을 잇는 여러 독창적인 실험에서 증명됐다. 얽힘은 실재할 뿐만 아니라 도처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파인먼은 연산, 즉 컴퓨터로 양자물리를 모사하는 일의 문제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았다. 바로 확률이었다.

"양자계는 어떤 의미에서 항상 자신의 미래를 연산한다는 것이 파인먼의 통찰입니다. 따라서 고유한 역학을 가진 아날로그 컴퓨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넷의 말이었다.

"우리가 우리의 불편하고 작은 손가락으로 셈을 배웠을 때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간 것이다. 우리는 정수가 개별적이고 고유한 값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롤프 란다우어의 냉철한 지적이었다. 실제 세계, 다시 말해 양자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었다.

 비트가 이것 아니면 저것인 고전적 컴퓨팅에서 n비트는 2^n 값 중 하나를 인코딩할 수 있다. 반면 큐비트는 모든 가능한 중첩과 함께 이 불값들을 인코딩할 수 있다. 이로써 고전적 컴퓨터는 할 수 없는 병렬처리의 가능성이 양자컴퓨터에 생기는 것이다.

가능성의 그림자 망을 측정하는 것은 큐비트를 고전적인 비트로 바꾼다. 양자 정보는 취약하다. 연산의 결과를 파악하는 유일한 방법은 양자적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양자 정보는 꿈과 같다. 덧없으며, 인쇄된 페이지의 단어처럼 확고하게 존재하는 법이 절대 없다. 베넷은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책을 읽고 같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꿈을 이야기 하려고 하면 꿈에 대한 기억이 바뀐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꿈은 잊어버리고 오직 꿈에 대해 말한 것만 기억하게 된다." 결국 양자 지움은 진정한 취소가 된다. "심지어 신도 잊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휠러는 후학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끈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기하동역학의 양자적 버전을 연속체의 언어에서 비트의 언어로 번역하십시오." "수학적 논리를 포함하여 수학이 얻은 강력한 도구인 상상력의 눈으로 하나씩 살피십시오. ... 그리고 이러한 각 기법에 대해 비트의 세계로 전사하는 것을 해결하십시오." 아울러 "힘을 더해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진화로부터 물리학의 다층적 구조를 밝히는 모든 특성을 파헤치고, 체계화하고, 보여주십시오." "'마지막' 당부입니다. 의미를 확립하는 기본 단위로서 '비트'라는 용어에 대한 깔끔하게 명확한 정의가 없는 것을 개탄하지 말고 축하하십시오. ... 대단히 큰 수의 비트들을 조합하여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얻는 방법을 배운다면 비트와 존재의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은 과제는 바로 의미의 확립이었다. 이는 비단 과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주라고 부르는) 이 도서관은 모든 정보를 소장한다. 하지만 모든 지식이 모든 오류와 함께 나란히 꽂힌 채 거기 '있기' 때문에 어떤 지식도 발견할 수 없다. 거울의 회랑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반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고,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 이보다 더 완벽한 정보 과잉의 사례는 없다.

포는 똫나 뉴턴의 옹호자인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의 글도 읽었다. 포는 이렇게 썼다. "모든 것을 대수적으로 '완벽하게' 분석하는 무한한 이해력을 가진 존재"는 파동을 그 기원까지 역추적할 수 있다.

라플라스는 완전히 뉴턴의 기계적 결정론에 빠져 있었다. 라플라스는 뉴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느 것도 우연에 좌우되지 않는 태엽 장치 같은 우주를 주장했다.

이 존재는 우주의 가장 큰 천체들의 움직임과 가장 작은 원자의 움직임을 같은 공식으로 아우른다. 이 존재에게는 어느 것도 불확실하지 않을 것이며, 미래는 과거처럼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탤벗은 밈과 같은 것을 보았다. "화가가 그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계 장치를 통해 그림이 '그 자신'을 만든다."

사실상 바벨의 거대한 앨범이 존재한다. 하지만 또한 태양의 중요업무가 기록원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가 지닌 모습의 인상, 우리가 하는 행동의 그림을 남기는 것이라면 어떨까? 그래서 ... 우리 모두가 아는 것과 달리 다른 세상은 어쩌면 사람들의 이미지가 살고 행동하며, 이런 이미지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온 거래로 이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체의 보편적인 본질은 그저 소리와 이미지의 구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튜링은 컴퓨터를 우주처럼 상태의 집합으로 보는 것이 최선이고, 모든 순간의 기계의 상태는 다음 순간의 상태로 이어지며, 따라서 기계의 모든 미래는 최초의 상태와 입력 신호로부터 예측 가능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주는 자신의 운명을 연산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를 컴퓨터라고 했을 때 우리는 여전히 그 메모리에 접근하려고 애쓰는 것일 수도 있다. 우주가 도서관이라면 그 도서관에는 선반이 없다. 모든 세상의 소리들이 대기를 통해 퍼질 때, 어느 특정한 원자 덩어리에 붙어서 남는 말은 하나도 없다. 말은 어디에나 있고 모든 곳에 있다. 이런 이유로 배비지는 이 정보 저장고를 "카오스"라고 불렀다. 다시 한 번 시대를 앞서갔던 것이다.

인쇄의 발명은 "인류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인쇄는 근대적 정신을 형성했다.

인쇄가 발명되면서 '역사의 어느 지점에' 있느냐 하는 감각(자기 앞에 펼쳐진 과거를 보는 능력, 정신적 대조연표의 내면화, 시대착오에 대한 이해)이 생겼다.

인쇄기의 진정한 힘은 텍스트를 안정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처한 곤경에 대한 오독이다. 현재의 어려움은 기억상실증의 엄습이 아니라 이전의 어떤 세대들이 경험한 것보다 더 완벽해진 기억 능력에서 기인한다. 망각이 아닌 안정적인 기억 회복, 기억 상실이 아닌 기억의 축적이 현재의 난국을 초래했다.

'홍수 deluge'는 정보 과잉을 묘사하는 사람들의 흔한 비유가 됐다.

데이터의 세례 속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된다.

망각은 결점, 낭비, 노쇠의 징조였다. 하지만 이제 망각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망각은 기억만큼 중요할지도 모른다.

베토벤은 바흐의 음악을 대부분 몰랐지만 우리는 조곡과 성악곡과 벨소리를 모두 갖고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즉시 혹은 빛의 속도로 온다. 전지의 증상이다. 이것을 무한한 플레이리스트라고 부른 비평가 알렉스 로스는 이것이 얼마나 양면적인 축복인지 안다. "충만의 자리에 불안이 들어서고 갈망과 불쾌의 중독적인 주기가 형성된다. 한 경험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이 끼어든다." 풍요로움의 낭패. 정보는 지식이 아니며, 지식은 지혜가 아니라는 것을 또다시 떠오르게 한다.

선택은 신뢰와 취향의 문제를 제기한다.

정보가 저렴해지면, (특정 정보에) 주목(하도록 만드는 것)이 비싸진다.

"파일"은 원래 16세기 영국에서 보관하고 참고하기 위해 전표나 청구서, 메모, 편지를 매다는 선이었다.

셈법은 언제나 바뀐다. 블로거와 트위터러들에게 물어보라. 너무 많은 입과 너무 많은 귀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쁜가?

 

인포메이션 | 제임스 글릭 - 교보문고

인포메이션 | 21세기 스마트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꼭 읽어야 할 책!그 누구라도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만 가지고 있으면 세계 어느 나라든 실시간으로 정보 전달과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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