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작은 책장

[독후감]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 한문화

neulvo 2023. 8. 2. 23:47

오랜만에 이렇게 책을 또 다 읽었다.

이번 책은 생각할 내용이 많아 꽤 오래걸렸다.

이동하는 중에 틈틈히 읽으려고 노력했고

2~3장이라도 읽다보니까 이렇게 다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다수의 철학자들의 글을 엮어 만든 것으로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대한 저명한 전문가들의

각기 다른 관점과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 포인트다.

그리고 생각해볼 거리가 많아서

책을 읽는 것 자체로도 많은 공부가 된다는 것이

이 책의 또다른 좋은 점이다.

물론 내용이 압축적이고 깊이가 있다보니

틈틈히 읽기에 좋은 책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트릭스에서만 찾을 수 있는

관점이나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아울러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아, 참고로 나는 이 책을 한 유투브의 추천으로 구입했었다.

뇌, 인공 지능, 미래와 같은 키워드들은

항상 나를 자극하는 것 같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밑줄 치고 페이지 접으면서 읽었는데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다 다룰 수는 없는 것 같고

그 중 몇 가지만 옮겨 적어 놓고서 마무리하겠다.

부분을 발췌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 내용을 내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녀는 라틴어로 쓰여 있는 그 글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뜻이라고 네오에게 가르쳐준다. 이 격언이 예언자의 예언을 이해하는 열쇠다. 델피의 아폴론의 신탁소에도 같은 문구가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피티아의 예언을 해석할 때, 분명 신탁을 통해 주어진 그 어떤 실제적인 답변보다 더 중요하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깨닫고 이와 관련된 격언, 즉 '시험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실천하며 살았다.

"보면 믿게 되지만, 만져지는 것이 진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촉각이 기만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촉각은 기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눈앞의 형체를 보고 환영이나 신기루인지 혹은 아닌지를 가늠할 때 촉감을 사용한다. 아무런 접촉의 느낌 없이 사람의 손을 통과하면 그것은 환영이나 신기루이다.

허무주의란 어떤 궁극적인 목적이나 근본적인 의미를 결여한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데, 그런 속성 때문에 허무주의는 이전 시대에 인류에게 영감을 주었던 위대한 질문들과 활발한 탐색들이 더 이상 인간의 영혼에 자리잡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라면 지하 생활자에게서 계몽 사회 과학에 대한 무지몽매한 부정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계몽 이론에 내재하는 모순들을 지적한다. 지하 생활자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 동시에, 그의 집요하고 압도적인 논리적 토론술의 원천이기도 한 주된 모순은 자유에 관한 것이다. 계몽 이론가들은 가족, 종교, 정치 권력 등 다양한 유형의 외부적 권위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한다. 그러나 계몽 이론들이 실행에 옮겨지자 뜻하지 않게 자유가 없어지는 결과가 발생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등장하는 이론가 시갈료프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나는 내가 수집한 자료에 휩쓸리고 말았어.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나의 의도와는 모순이지. 의도는 무제한의 자유였는데, 결론은 무제한의 독재 권력이 되고 말았거든."

실존주의자들은 존재에 어떤 내재적인 목적이나 잠재적인 의도가 없다고 본다. 그들은 세계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의미 부여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과 더불어 그것이 함축하는 자유와 그것이 수반하는 책임을 강조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논의하는 공통적인 주제는 부조리, 소외, 고뇌, 본래성 등이다. 네오의 선택은 다른 많은 실존주의적 주체들을 함축하고 있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본래성과 비본래성 사이의 선택이다.

'어째서 우리는 우리 눈앞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허구에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가?' 내러티브는 이야기의 요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중략)... 우리가 허구에 끌리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 반응하는 방식을 스스로 즐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화 속의 허구적인 공간을 경험할 때, 우리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없지만 인지적으로는 비슷한 경험을 하는 셈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공간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불신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믿음을 창조한다.

현실에서건 허구에서건 두 경우 모두 우리에게는 사건의 뼈대만이 주어진다. 우리는 거기에 살을 붙이기 위해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세계는 정말로 구체적으로 존재하지만 이 구체적인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지각은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객체의 모든 특징들은 객체 쪽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주체 쪽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마음이라는 한계 안에 있으므로 마음은 세계의 구성 성분이 아니다. 마음은 세계의 세계성의 토대이자 세계의 구성 요소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스스로 그 토대에 의거할 수 없고 그 스스로의 척도가 될 수 없다. 마음이 세계에 대해 초월적인 특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운명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고 바뀔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 세계에서 왜 자유를 위해 싸우는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만약 모든 사건이 다른 사건들에 의해 야기된다면 자유 의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유 의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원자가 공간을 움직일 때 불규칙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에 주목했다.

미래는 열려 있다. 그것은 미래가 하나 이상의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하나 때문에 자유 의지의 존재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은 자유 의지를 가능하게 한다.

다음 단계는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함께 온다. 인간은 그들이 만든 세계의 재현물들을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으며, 소비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것들을 통해 세계를 위조할 수도 있다. 시뮬레이션은, 이전에 존재했을 수도 있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객관적인 처리 과정과 주관적인 경험을, 통상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실재와 똑같이 재현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동차의 충돌이나 튀긴 양파 냄새나 무중력 상태의 경험 등을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텍사스와 뉴저지의 실험실에서 그리고 지역 박물관의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실제로 이것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그러한 시뮬레이션의 산물들, 즉 시뮬라크라로 가득 찬 위조된 세계에서 산다.

후기 자본주의 소비 중심 사회에서는 '실제적인 사회적 삶'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마치 연극과 같은 특성을 띤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이웃들은 무대에 선 배우와 엑스트라로서 실제적인 삶을 연기한다. 영혼이 박탈된 자본주의적 공리주의 세계의 궁극적인 진실은, 실제적인 삶이 그것의 구체성을 잃고 공허한 쇼로 역전된다.

여기서 대타자는 상징계에서 주체를 조직적으로 소외시키며,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무엇이다. 주체는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 구조에 의해 '말해질' 뿐이다. 간단히 말해 이 대타자는 사회적 실체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이러한 사회적 실체 때문에 주체는 결코 자신의 행동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며, 그가 행동한 최종적인 결과는 언제나 그가 목표했거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무엇이 되고 만다.

매트릭스의 올바른 통찰력은 도착의 두 가지 측면을 병치한다는 데 있다. 한 가지는, 현실이라는 것이 일시적으로 무력화될 수 있는 자의적인 규칙들에 의해 규제당하는 가상의 영역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주체가 순전히 도구화된 수동성으로 전락하는데 이것이 자유의 숨겨진 진실이라는 것이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책 소개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는 제목에서부터 선명히 그 성격이 드러나듯이 대중을 위한 ‘철학 교양서’를 지향하고 있다. 엮은이 윌리엄 어윈이 네오와 소크라테스가 겪는 운명의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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