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작은 책장

[독후감] 채식주의자_한강 / 창비

neulvo 2021. 8. 15. 14:47

몸 관리를 하면서 매일 1~2시간 책을 읽는 습관을 들였다.

이전에는 책을 읽는 게 따분한 적도 있었고

책장이 빨리 넘어가지 않는 게 답답한 적도 있었는데

습관을 들이고 차분히 읽다 보니

따분하게도 지루하게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책 읽는 일이 하루를 충실하게 만들어주어 기분이 좋다.

 

이미 1984, 그리스 로마 신화 등 책을 몇 권 읽었는데

이번에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을 읽고

문득 독후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라는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별 거 없다.

방 한구석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멘부커 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샀는데

읽지 않고 내버려 둬 오랫동안

방 한구석 어정쩡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은근히 눈에 띄어서

매번 흘금 볼 때마다

읽어야지 하다가

어느샌가부터 언젠가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아서인지

미련이 많아서인지

풀지 못한 숙제들이 많은데

이 책도 그중 하나라서

이번 기회에 풀어보자 하고 읽어보았다.

 

일단 이 소설은 상처에 대한 얘기이다.

자신의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더 큰 상처를 주는 주변인들,

타인의 상처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형부,

그리고 상처를 받으면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내이자 언니.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괜찮은 척해도

무의식 속에서는 상처를 받고 산다.

무의식 속에서는 상처가 쌓인다.

한 번 벌어진 상처는 돌이킬 수 없다.

나았다고 생각해도 가슴속에 남아있다.

 

상처의 임계점은 어디일까?

사람은 어디까지 견딜 수 있고

어디까지 괜찮은 걸까?

 

한 번, 상처가 터져서

경계를 넘어가버린다면

다시 돌아올 순 없는 걸까?

 

그리고 상처를 낫게 할 순 없을까?

아니, 상처를 이겨낼 순 없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에선 어떤 임계점을 볼 수 없었다.

계기는 꿈이었지만

어느샌가 영혜는 경계를 넘어버렸다.

 

사람들이 정상이라 생각하는 경계를.

 

이상해졌다.

 

그렇다. 사실 임계는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건강도 그렇듯이

어느샌가 아파있고 어느샌가 달라져있다.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경계를 넘는다는 건 보통 그런 것 같다.

 

꼭 이상해지는 것이 아니어도

무언가 달라짐을 경험해본 적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영혜는 경계를 넘어서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점점 더 멀리멀리 날아가기만 했다.

 

그런 영혜에게

형부는 욕정을 품는다.

몽고반점이라는 매개에 집착한다.

 

어떠한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다른 어떠한 것에도

의미를 두지 못함을 의미한다.

 

삶이 그런 걸까?

의미가 없는 걸까?

 

나이가 들면 무엇이든

경험해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점차 흥미가 사라지고

점차 의미가 퇴색되기도 한다.

 

반복되는 매일이

지겨워지고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그동안 위안을 주던 것들조차

빛이 바래지기도 한다.

 

어쩌면 영혜의 몽고반점이

형부의 예술적 감각을 깨운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보단

어떠한 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형부가 기이한 욕정에 집착했다고 생각한다.

 

파멸적인 욕정.

 

사람은 지치고 힘들 때

구원을 꿈꾸는 것만큼

파멸을 꿈꾼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데

구원이란 너무나도 요원하게 느껴지니까

그보다 쉬운

파멸에 눈이 가게 된다.

 

어쩌면 영혜가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한 만큼이나

형부도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그 때문에

그 둘이 그 어느 순간에

인간에서 벗어나

교합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만큼은 서로를 공감하고

서로 교감했으리라.

 

방향과 방식이 달랐을 뿐

그 둘은 결국

현실을 이겨내지 못해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점에서

닮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달라져버리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일까?

 

판단하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

 

영혜가 채식을 시작하고 나서

누군가 영혜를 봐주고

누군가 영혜를 신경 써줬다면

영혜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을까?

 

형부가 욕조에 누워있었을 때

그 모습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형부가 달라졌을 수 있었을까?

 

어떤 현상이 일어나기 전엔

전조가 있기 마련이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약한 지진이 퍼지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개

알아차리기 어렵고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쉽게 외면받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상처를 봤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보듬어줄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보통

그 상처를 내보이는 사람을

이상하게 취급하고 그로부터 멀어지려고 한다.

 

그게 안전하니까.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고

보듬어 준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우리는 느낀다.

 

실제로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상처마저도

우리는 쉽게 무시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참 어려운 일이다.

 

또 상처를 보듬어 준다고 해도

그 상처가 낫는다는 보장도 없다.

 

상처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덧나고 다시 재발한다.

 

상처를 가진 사람이

상처가 너무 커서

도움을 거부할 수도 있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상처를 이겨낼 수는 없는 걸까?

 

이것도 어렵게만 느껴진다.

 

우리가 가진 힘이 얼마만큼일까?

우리는 충분히 강한가?

 

아내이자 영혜의 언니인 영희에게도

상처가 있다.

알게 모르게 쌓인 상처가 많다.

 

하지만 영희는 영혜나 그의 남편처럼

상처를 터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처를 이겨낸 것도 아니다.

그냥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엄마로서 지우를 위해,

언니로서 영혜를 위해,

어쩌면 스스로를 위해.

 

영희는 어쩌면 보통의 우리를

대변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상처를 받는 건 소수의 이상한 사람들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 상처를 받고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각자의 이유를 위해서 묵묵히.

 

상처를 이겨내는 것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상처를 이겨낼 생각도 못한다.

 

상처를 이겨내는 것은

어렵고

우리는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일까?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정확한 방법은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딘가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곳이

있는 것은 좋은 것 같다.

나는 친한 친구들에게 항상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나에겐 위안이 되었기 때문에.

 

상처는 덮을 수 없다.

 

덮으려고 하는 것보단 어딘가에라도 얘기하는 게 낫다.

도움을 받는 것까진 기대하지 않더라도.

 

딱 내가 아는 것은 그 정도.

 

그리고 상처에 너무 집중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

누군가 이상해졌다면 그것은 상처에 너무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처를 바라보는 것은 좋다.

하지만 상처에 집중하는 것은 좋지 않다.

상처에 집중해서 삶을 망가뜨리기엔 삶이 너무 아깝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채식주의자 | 창비 – Changbi Publishers

한강 1970년 늦은 11월에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

www.changbi.com

728x90